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오 10세 (문단 편집) == 교황 선출 == [[파일:external/www.catholictradition.org/papal-gallery74.jpg|width=200]] 본인은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며,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려 하면 웃어넘기곤 했다. 그렇기는 해도 그가 농담을 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내가 교황이 되든지 아니면 죽을 것임을 당신은 압니다. 이는 깰 수 없는 사건이지요. 나는 9년 동안 톰볼로에서 보좌[[신부(성직자)|신부]]를 지냈고, 그 다음 9년 동안은 살자노에서 주임신부였으며, 다음 9년 동안 트레비소에서는 종교법 고문을 지냈습니다. 그 후에는 9년 동안 만투아의 주교였고, 이제는 다시 9년 동안 베네치아 총대주교를 지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교황이 되든지, 아니면 죽든지 할 것입니다. 그의 동료가 "그렇다면 나는 전자를 바랍니다."라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후자를 바랍니다. 교황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 또한 그는 교황선거가 끝나면 베네치아로 돌아가려고 표를 미리 끊어 놓았는데, 교황으로 선출되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설마 본인이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는 생각치 않았던 모양. ~~행운의 기차표???~~ 사실 행운의 기차표 덕이라기 보다는(...), [[이탈리아]]의 윗동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개입이 있었다'''. 전임 교황 [[레오 13세]]의 온건한 진보 성향, 그리고 반(反) [[헝가리]] 정책[* [[헝가리]]가 슬라브족을 탄압하는 것에 맞서 [[예수회]] [[선교사]]를 보내 지원하고, 공공연히 헝가리의 교육정책에 간섭했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자신의 명의로 크라쿠프 대주교인 푸치나 추기경이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던 것.[* 이게 가능한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신이 [[신성 로마 제국]]이었는데, [[암흑시대]] 말기부터 교황 선출에 대한 반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레오 13세 재임기 1887년부터 국무장관이었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1843~1913)이 [[콘클라베]]에서 유력 후보자로 떠올랐는데,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추기경들 다수가 그를 지지하고 있던 상태였다. 거의 대부분의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은 람폴라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커지자, 이에 거부감을 가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거부권을 행사했고, 결국 람폴라 추기경은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 사전』176쪽,『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110쪽 참조.] 결국 1903년 8월 4일 실시된 제7차 투표에서 베네치아 총대주교 주세페 사르토, 즉 비오 10세가 선출되었던 것. 이 때의 기억 때문인지 비오 10세는 이듬해 개별 국가의 콘클라베 간섭을 금지하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선거 개입권을 폐지했다. 그리고 아쉽게 교황 자리를 놓친 람폴라 추기경에게는 성무회의 의장직을 제수했다.[[http://m.100.daum.net/encyclopedia/view/b05r4044a|#]]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